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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었던 것 같아 달리 할 말은 없어카테고리 없음 2024. 4. 14. 01:14
이제야 모든 게 다 끝난 기분이 든다. 만나고 헤어지길 몇 번을 반복하고 난 이 시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헤어졌을 땐 그냥 그 사람이 나한테 들려줬던 창끝처럼 날카로운 말들을 곱씹으면서 원망하고 화를 냈었다. 화를 내고 있으면 그런 연애가 끝났다는 게 후련하기만 했고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많이 그립고 슬프다. 아직 겉으론 울지 못했지만 속으로 많이 울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사랑이 그 사람에게 제대로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한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 안다고 자주 말해 줬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그래서 여기서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솔직히 있다. 연락을 자주 하면 자꾸 싸우게 됐는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지치는 게 싫어서 일부러 더 공부와 일에 몰두하려 했던 순간들도 있다. 그 사람이 내가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픈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슬픈 생을 다 책임지고 끌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연애가 꽤 오래 지속되면서 동시에 나도 때로는 그 사람에게 좀 기대고 싶어지기도 했는데, 늘 강아지처럼 챙겨 줘야 하는 기분이 들어 부담이 됐고 밤에 전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투정을 받아 주는 게 종종 과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냥 어리거나 강아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 내가 그런 마음을 삼키는 대신 솔직하게 말하면 내 짐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미래를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별을 말하기 전 몇 주 동안 나는 전에 없이 바라는 게 많았다. 백일 기념으로 맞추기로 한 커플링을 얼른 결제해서 받아 보고 싶다고 보챘다. 커플링은 물론 그녀와 헤어지지 않고 오래오래 만날 생각으로 내가 먼저 제안한 거기도 했고, 우리 사랑에 대한 물리적 증표 같은 의미로 그녀 손에 반지를 끼워서 혹시라도 나랑 연락이 안 되거나 외로운 날에도 반지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의 크기를 확신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맞추기로 약속한 뒤로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구입이 미뤄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로는 커플링을 빨리 맞추고 싶다고 하고 새 디자인을 고르는 데는 꽤 열정을 보였지만, 내가 일곱 번은 넘게 말을 꺼냈고 사이즈와 구매처까지 전부 말해 줬는데도 이상하게 자꾸 결제를 미뤘다. 내일 할게, 네가 바쁘지 않은 주말에 같이 더 얘기하자, 이런 식으로. 강수를 둬야겠다 싶어 나랑 커플링을 안 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운하다고 말했던 새벽에 그 사람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부담감이 들어서 결제를 미루고 있었다고. 이렇게 밀어붙여 주는 순간이 필요했다고. 결국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절대 맞추지 못했을 커플링이었나? 허망했다. 그래도 결국 커플링을 사게 돼서 기뻤다. 또 다른 날엔 그녀에게 좀 더 어른스런 목소리로 자주 말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평소에는 아주 낮고 차분한 톤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나한테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애교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날이 잦았는데 그런 게 사랑스럽고 귀엽기도 했지만 피곤하고 지치는 날엔 버겁기도 했으니까. 낮고 차분한 톤 역시 그녀가 가진 많은 측면들 중 일부였으니 그걸 내가 사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그런 톤으로 대화하면 성인 대 성인으로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는 느낌이 들어서 좋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말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연인에겐 아이 같고 애교스런 모습을 더 보여 주고 싶은데 내가 어른스런 모습을 더 원하는 것 같아서 상처라고.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더 좋아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나한테 보여 줘도 되는 것 아닌가? 내 감정보단 그녀 스스로 바라는 걸 더 생각하고 내가 거기 맞춰 주길 바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바랄 수 있는 건 없고 이 사람은 그냥 내가 처음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텐션 그대로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어 주길 바라는구나. 그런데 일 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면서 내 마음도 조금씩 마모되어 왔고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텐션을 낼 순 없었다. 처음엔 그냥 내가 무한한 크기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주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도 그만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
내가 뭘 바라는지 내 마음이 어떤지 좀 더 생각해 줬으면 하고 욕심이 났었다. 쉬는 날 각자의 집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자고 보채기보단 컨디션을 조절하고 시간을 내서 나랑 직접 데이트를 해 주길 바랐다 나는 영화나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원격으로 영화 보거나 게임 하는 걸 좀 힘들어했고 (그걸 그 사람도 알고 있었고) 그런 걸 하기보다 그냥 직접 만나서 눈을 맞추고 커피를 한잔하고 인생네컷을 찍고 그런 데이트를 하고 싶었으니까.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도 그녀 집앞까지 찾아가기엔 거리 문제나 시간 문제로 어려운 상황이라 절대로 먼저 보채진 않았지만, 컨디션이 나아지면 근처 역까진 찾아갈 테니 만날 수 있는 날엔 꼭 말해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그녀는 컨디션이 괜찮은 날 병원도 가고 돈을 벌기 위해 피아노 레슨도 가고 어머니 생신에 고깃집을 예약해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나한테 먼저 만나자고 하진 않았다. 사실은 두 번 정도 약속을 잡았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가 아침마다 갑자기 몸살이 났다며 약속을 취소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그냥 지하철역에서 다시 나와 집으로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혹시나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해서 종종 슬프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스로를 위로했다. 병원은 꼭 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고 데이트를 할 때처럼 최상의 컨디션을 내지 않아도 CT를 찍거나 항암제를 맞는 일은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랑 데이트를 하면 돈을 벌 수 없지만 피아노 레슨은 생계 유지에 필요하니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그녀 어머니 생신을 그녀가 여건이 될 때 꼭 챙겨 주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멀리 사는 나랑 약속을 잡는 것보단 함께 사는 어머니와 외출해서 저녁을 먹는 게 더 편할 테니까. 또 데이트는 영영 하지 못했지만 전화로 데이트 계획을 잡을 때 나는 인스타 감성의 예쁜 개인 카페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런 개인 카페들은 싫다며 할리스나 투썸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자고 했다. 인스타 감성 카페들은 화장실이 쾌적하지 못하고 웨이팅이 길고 의자가 불편하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예약제로 운영되는 조용한 티룸 같은 걸 찾아서 보내주기도 했었는데 그런 덴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더 보채진 않았다. 몸이 아프니까 웨이팅이 길어 보이는 곳은 부담이겠지. 나도 그런 게 데이트 로망일 뿐 평소에는 의자가 불편해 보이는 카페를 딱히 좋아하진 않으니까 이해했다. 특별히 예쁘고 새로운 곳에 가지 못해도, 낭만 없이 삭막한 수원역 할리스의 각진 소파에 앉아 꽉 찬 테이블들 사이에서 다 아는 맛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어도 그 사람이랑 앉아 있을 수 있으면 뭐든 좋을 것 같았으니까 괜찮았다. 커피는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건데 굳이 감성 카페를 고집하는 게 남자답지 못한 것 같아 말을 삼키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씩은 생각했다. 내가 어떤 데이트를 하고 싶은지 좀 더 생각해 줄 수 있으면 어떨까. 내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투썸이나 할리스에 가자고 해 줬던 마음만큼, 그녀도 웨이팅이 좀 길고 의자가 불편하다 해도 한번쯤은 내가 보냈던 티룸에 가자고 하거나 그녀 맘에 들 만한 예쁜 카페를 찾아봐 주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차라리 행궁동이나 망원동에 가면 모를까 수원역엔 네가 원하는 카페는 없을 거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수원역 근처에서 내가 그런 카페를 안 가 본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우리의 물리적 거리와 그녀가 커버할 수 있는 동선을 고려했을 때 수원역보다 더 나은 옵션은 없어 보였고 행궁동이나 망원은 그녀 집에서 더 멀리 가야 하는 곳이어서 나는 우리가 거기까지 갈 순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가장 쉬운 선택지인 수원역 할리스에서조차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마음을 말하진 않았다. 나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산책하고 바깥 공기를 마시는 마음은 그녀도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더 보채면 그녀가 속상할 것 같았으니까. 나는 원하면 언제든 혼자서라도 가고 싶은 카페에 가고 먹고 싶은 걸 시켜 먹고 멀리 여행을 갈 수 있지만 그 사람은 몸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라 누구보다 답답하고 힘들 테니까. 그러다 바라는 걸 말하면 좀 나아질까 해서 그 사람이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선 몇 번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고 외려 서로에게 더 상처가 된단 걸 깨달았다. 그 순간에 이 사랑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내 마음을 알아주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고(아마 알아주려고는 했겠지만 나한테 느껴지지는 않았고),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크기의 사랑을 영영 주지 못할 것 같아서. 또 그녀는 아무리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크게 난다 해도 차마 먼저 이별을 말하지는 못할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끝내야 할 관계라면 내가 먼저 떠나는 게 맞았다. 이별 사유로 너무 허울 좋은 문장들만 적은 것 같아 비겁하고 솔직하고 이기적인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자꾸 사랑 때문에 마음이 외로워지는 게 힘들었다. 그녀와 다투고 난 다음날엔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으면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도통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시험 하나 날려 먹고 내년에 재수강을 하면 되는 문제겠지만 나는 특히나 이번 학기가 끝나고 바로 졸업을 해야 하고 학기를 다니는 중에 대학원 입시까지 치러야 하기 때문에 연애 때문에 학업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립고 슬프지만 이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서 나는 사랑해, 가 아니라 사랑했었어, 라고 말했다. '사랑해'의 가장 강한 부정은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랑했었다'이기도 하니까. 더 이상 그녀가 나한테 뱉은 창끝 같은 말들을 복기하며 나의 관념 속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로 추상화하면서 미워하지도 않는다. 김승일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기억의 천재인 그녀와 달리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때 들은 아픈 말들은 거의 다 잊었다.
커플링은 메종 마르지엘라 넘버링으로 맞췄다. 깔끔한 마르지엘라 같은 너....., 그런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꽤 좋아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일종의 이별 노래네. 나는 좀 굵은 디자인을 샀고 그녀는 얇은 걸 골랐다. 헤어질 때만 해도 그녀 마음은 많이 걱정했어도 나한텐 이별 후폭풍이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고 의미 부여 없이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나도 커플링을 보면 그녀 몫의 아주 얇은 마르지엘라가 생각나 이걸 도통 끼고 다니지 못할 것 같다.